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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안희정 출소했지만 피해자는 여전히 ‘재판 감옥’

아시아교정포럼 [2023-12-23 13: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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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안희정 출소했지만 피해자는 여전히 ‘재판 감옥’

2019년 겨울 김지은씨를 만났다. 그해 9월 대법원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유죄가 확정된 이후 그의 삶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폭력 피해를 당하면 “법대로 하라”는 말을 쉽게 내뱉지만, 현실적으로 ‘법대로’는 피해자에게 최선의 선택지가 되기에 부족하다. 형사처벌은 피해 회복의 일부를 담당할 뿐 처벌 이후 피해자는 또다시 혼자 남겨지거나 다른 싸움에 내몰리는 일이 많다. 지은씨도 싸움 이후의 삶에 대한 고통을 토로했다. 그에게 책 출간을 위한 출판사를 소개하고, 민사소송에 대해 논의했다.

재감정·신체감정 요구하며 부인하는 가해자 전략

성폭력 피해자들은 민사소송을 여러 이유로 망설인다. 소송 과정에서 피해자의 개인정보 유출 등 위험이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제1470호 ‘구치소서 온 ‘그놈’ 편지… 성폭력 피해자는 살려고 이사해야’ 참조), 유독 성범죄 사건에서 재판으로 금전적 손해배상을 원하는 피해자를 ‘꽃뱀’ 취급하며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서다. 그나마 민사소송에 앞서 혹은 동시에 진행된 형사재판에서 유죄 확정판결이 내려질 경우 피해자가 손해 입증 노력을 형사에 비해 덜 해도 되기 때문에, 수사·재판 과정에서 금전적 배상을 받지 않았던 피해자들은 번거롭고 힘들더라도 민사소송을 시작한다.

지은씨도 안 전 지사가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뒤 ‘여성 노동자’로서 자신이 입었던 피해와 관련해 가해자 안희정과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충남도를 대상으로 2020년 민사소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소송을 시작한 지 만 3년이 넘은 2023년 12월 현재 1심조차 끝나지 않았다. 피고 안희정 쪽이 사실관계부터 다시 다투자며 재판 지연 전략을 펼치는데다, 재판부 역시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충남도도 도정과 관계없는 안희정 개인의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 중이다.

안희정 쪽은 원고(피해자) 쪽이 제출한 각종 진료·진단 기록만으로는 성폭력과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는다며 신체감정을 요구했다. 진료기록의 재감정과 신체감정 등을 요구하며 인과를 부인하는 전략은 성범죄 민사재판에서 2020년 이후 피고(가해자) 쪽이 적극 선택하고 있는데,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이면 피해자는 감정에 드는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추가 피해에 노출된다. 상담과 치료를 통해 피해를 서서히 회복하던 사람도 감정을 다시 받게 되면 피해를 입었던 당시 상황과 상태로 강제로 끌려가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논의 끝에 지은씨 쪽은 신체감정에 응했으나 감정을 담당할 병원과 의사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다. 신체감정 조건이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법적 책임이 전제된 신체감정을 병원 쪽에서 거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21년 7월 이후 병원 7곳에 감정을 요청했으나 겨우 한 곳만 받아들였기에 재판이 재개되는 데도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은씨는 신체감정을 받기 위해 입원하면서 ‘그래도 이 고통을 견디면 재판에 속도가 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안희정 쪽은 감정 결과가 불리하게 나왔다고 판단했는지 2년 만에 재개된 재판에서 재차 신체감정을 요구했다. 피해자의 과거 병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안희정 쪽이 원하는 신체감정 결과물을 받아볼 때까지 기왕력(과거 겪은 질병·상해 등) 운운하며 피해자를 괴롭히겠다는 의도다.

민사재판이 지연되는 동안 만기 출소

또한 피고 쪽은 각종 사실조회 신청을 통해 원고의 개인정보, 사건 관련 정보, 가족·지인 등의 정보 등을 빼내려 한다. 재판부가 받아들이면 원고를 압박할 무기를 갖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재판 지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안희정의 민사소송 대리인은 수사 단계부터 계속 안희정과 함께해왔던 인물이다. 그는 피해자를 공격하고 수사·재판 과정에서 알게 된 피해자의 사적 정보를 유출해온 것으로 의심되는 자이기에, 그가 민사로 확보한 자료로 어떤 추가 가해를 할지 알 수 없다.

안희정 쪽은 이번 민사에 포함된 2차 가해 행위도 부인하고 있다. 2019년 안씨의 당시 배우자가 페이스북에 피해자 의료기록 등을 올리며 피해 사실을 부정하는 글을 올린 것이나, 안씨 측근이 온라인상에 올린 글 등에 대해 본인이 그 사실을 몰랐거나 개입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안씨가 직접 하지 않았으면 2차 가해 책임이 사라지는가? 시인 박진성의 경우 재판부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제1490호 ‘박진성 감옥 갔다, 이게 그의 40대란다’ 참조). 박씨가 직접 하지 않은 2차 가해더라도 본인의 언행에서 파생된 가해라면 박씨가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려는 행위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씨가 구속됐더라도 가족과 연락할 수 없었겠는가? 측근과 지지자들에게 2차 가해를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겠는가? 다 핑계일 뿐이다.

이렇게 민사재판이 지연되는 동안, 안희정은 3년6개월형을 모두 채우고 2022년 8월4일 만기 출소했다. 최근에는 여행을 다니며 지지자들과 만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고 있다. 언론은 지지자들이 페이스북 그룹에 올린 “안희정 지사님은 이제 죄인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인용해 “정계 복귀”를 운운했다.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에게 질문한다는 명분으로 안희정 성폭력 사건을 “성희롱” “남녀 간의 연애” 등으로 표현하며 2차 가해에 동참했다. 지은씨를 고통에 몰아넣었던 언론의 ‘따옴표 저널리즘’이 또다시 피해자와 연대자를 옥죄는 것이다. 기성 언론에 뒤지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터넷 매체도 가세해 김지은씨와 연대자들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기도 했다.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다스뵈이다>는 2023년 12월 방송에서 안씨 캠프에서 한 달 남짓 일했다는 여성을 불러 김지은씨가 거짓말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그대로 내보냈다.

정작 반성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제가 2차 가해자인 것 같아요.” 2023년 9월 제주 탐라도서관에서 진행한 북토크 질의응답 시간에 한 여성 독자가 안희정 사건과 관련해 언론에서 보도한 내용, 즉 안씨와 그 가족·주변인 등에 대한 기사만 보고 정작 피해자인 김지은씨의 삶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다며 한 말이다. 사법시스템을 통한 싸움이 얼마나 지난하고 고통스러운지, 언론 등이 전하는 소식이 얼마나 편향됐는지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반성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피고의 방어권 보장을 명분으로 형식적·기계적 재판을 진행하는 법원과 ‘따옴표 저널리즘’에 기반한 보도를 쏟아내는 언론이 있는 한, 피해자의 회복과 일상 재구성은 요원하다. 2024년 2월로 예정된 법관 정기인사를 빌미로 또다시 재판이 지연되는 것은 아닌지,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안희정을 이용하려는 다양한 욕망이 언론과 만나 추가·파생 가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김지은의 그림자 중 하나로 계속 감시하며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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