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범죄의 민낯]① 이유도 모르고 속수무책 당했다...서현역·조선·정유정 사건 공통점은
‘신림역 묻지마 살인’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지 채 2주도 안 돼 또 다른 비극이 벌어졌다. 3일 오후 6시쯤, 경기 분당구 서현동 백화점에서 20대 남성 최모씨가 차량과 흉기로 1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강력 범죄가 잇따르며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묻지마 범죄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범행 동기나 이유 등을) 모르겠으니 묻지 말라’는 메시지를 함의한다. 즉, 묻지마 범죄의 성격과 원인을 밝힌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재발을 막기 위한 근본적 방안을 마련하려면 묻지마 범죄의 본질과 원인부터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현동 칼부림 범인, 신림역 살인범 조선, 그리고 일면식도 없던 피해자를 흉기로 110차례나 찔러 살해한 정유정.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왜 이런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주로 여름에, 날카로운 흉기로, 범행 후 현장에 남아…‘현실 불만형’ 묻지마 범죄
묻지마 범죄는 법률 용어나 학술적 용어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동기가 뚜렷하지 않고 불특정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묻지마 범죄로 칭한다. 경찰에서는 ‘이상동기 범죄’를 공식 용어로 쓴다.
윤정숙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과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 등은 이미 지난 2014년 묻지마 범죄를 유형화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스라엘 히브루대학의 최소공간분석(SSA)을 따랐다. 이 분류법은 묻지마 범죄를 현실 불만형, 정신 장애형, 만성 분노형 등 크게 셋으로 나눴다.
신림동 묻지마 살인범 조선과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정유정은 ‘현실 불만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조현병 등 정신 장애를 앓는 심신미약자가 대체로 ‘정신 장애형’에, 주취나 약물 복용 상태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만성 분노형’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면, 현실 불만형은 그들과 다르다. 이들은 평소에도 사회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던 중 우울한 기분을 느끼며 범죄를 저지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적 정서 기능이 현저히 감퇴해 고립된 생활을 하고 대인 관계를 추구하지 않으며, 자존감 등 자아 기능이 떨어지는 경향도 있다. 이는 정신 장애나 마약 복용과 달리 심신미약에 따른 감형 사유가 되지 못한다.
조선의 경우 “세상 살기 싫다”, “뜻대로 안 된다”,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또래 남성들에게 열등감을 느껴서 그랬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유정은 “아버지의 재혼으로 배신감을 느꼈다”, “잘 안 맞는 할아버지와 계속 살아야 해 좌절했다”는 식으로 진술했다고 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실 불만형 묻지마 범죄자들은 대체로 여름에 노상에서 날카로운 예기(銳器)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고, 범행 후 현장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 역시 그랬다. 백주대낮에 신림역 한복판에서 범행을 저지른 뒤 계단에 앉아 쉬다가 순순히 체포됐다. 이들은 또 부모나 형제와의 관계가 양호하지 못하고 평소 자신을 해하려는 사고나 환상이 있으며, 자살 욕구가 있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들은 과거에 사람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을 확률은 상대적으로 낮다. 만성 분노형의 경우 91%가, 정신 장애형은 67%가 대인 범죄 전력이 있지만 현실 불만형은 전체의 37.5%만이 대인 범죄 전력을 갖고 있다고 윤 연구위원 등은 전했다. 조선은 흉기 상해를 포함한 전과 3범이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대신 정유정이 해당된다. 정유정은 아무런 전과가 없었으며, 이것이 사이코패스 테스트에서 감점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현실 불만형 묻지마 범죄자들은 그 외에도 피해자의 신체 여러 부위에 여러 번 상해를 입히는 성향, 게임이나 도박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성향이 강하며, 피해자의 평균 연령이 27.4세로 젊다는 특징을 지닌다.
서현동 칼부림 범인 최씨의 정신 장애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청부살인하려고 한다”며 횡설수설해 경찰이 정신 병력 등을 확인 중이다. 만약 정신 장애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두번째 유형인 ‘정신 장애형’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망상이나 환상, 환각 증상이 있거나 범행 당시 신체 건강 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현실 불만·무력감 탓 특정 집단에 돌려…왜곡된 영웅심리 개입도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들의 흉기 난동은 양상이나 범행 동기가 영미권 ‘외로운 늑대’형 테러리스트들의 총기 난사와 굉장히 흡사하다”며 “피해자를 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자신과 관계 없는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범행을 저지름으로써 공포심을 유발하려는 반사회적인 동기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묻지마 범죄자들의 반사회적 동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조선이나 정유정은 자신의 사회적 목표와 수단 사이 간극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범죄로 해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상균 백석대 경찰학과 교수 역시 “이들은 성장 과정에서부터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이유를 자신이 아닌 다른 데서 찾는 경향이 있다”며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무력감의 이유를 사회에서 찾고, 특정 집단이나 불특정 집단에 탓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경우 불특정 다수 가운데서 ‘건장한 젊은 남성’이라는 특정 집단을 골라 범행을 저질렀다. 정유정은 과외 알선 애플리케이션(앱)에서 ‘혼자 사는 여성’이자 ‘또래 명문대생’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일면식 없는 사람에 대한 무차별적 범죄임에도 피해자를 선정한 나름의 기준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서현동 사건 범인은 피해자를 완전히 무작위로 고른 것으로 보인다.
특정인에 대한 분노를 제3의 인물에게 대신 푸는 경우도 있다. 함혜현 부경대 공공안전경찰학과 교수는 “살해하거나 폭행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멀리 있어서 접근하기 힘들거나 그 사람이 자기보다 힘이 세서, 제3의 인물을 대상으로 삼아 분노를 대신 풀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일종의 왜곡된 영웅심리도 개입될 수 있다고 함 교수는 덧붙였다.
실제로 정유정은 범행 사흘 전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화해 “내가 큰일을 저지르면 아빠가 고통 받을 것이며, 큰일 저지르고 나도 죽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즉 애정을 갈구했던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제3자에게 피해를 주겠다는 심리가 범행 동기가 된 셈이다.
묻지마 범죄는 사이코패스 범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묻지마 범죄를 저질렀다 해서 전부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한건 아니다. 다만 김상균 교수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들의 특징, 즉 정성 결여성은 동기가 불분명한 묻지마 범죄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사이코패스 성향을 테스트하는 PCL-R 검사에서 정유정은 비정상 기준치(25점)를 넘는 28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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